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李(흥양이씨)
본관(本貫): 흥양(興陽)
시조(始祖): 이언림(李彦林)
유래(由來):
흥양 이씨(興陽李氏)의 시조(始祖)는 국자생원(國子生員) 이언림(李彦林)이다. 그는 고려 의 종(毅宗) 때 병부 상서(兵府尙書)와 공부 상서(工部尙書)를 거쳐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낸 후, 흥양(興陽)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흥양(興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원방(李元邦)
언림(彦林)의 증손 원방(元邦)이 동정(同正)을 역임했다.
이길(李吉)
7세손 길(吉)이 문과에 올라 봉상대부(奉常大夫)를 거쳐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에 이르러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다.
이균(李均)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서원(舒原)은 언림의 8세손이며, 서원의 아들 균(均)이 문과에 올라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다.
이건
전이 주자학(朱字學)에 능통하여 학명(學名)을 떨쳤다.
이준(李峻)
준(峻)은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예조 정랑(禮曹正郞)·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수차 의병(義兵)을 일으켜 나라에 공을 세웠다.
이원경(李元卿)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낸 원경(元卿)은 첨정(僉正) 대록(大祿)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흥양 이씨(興陽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450가구, 13,8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李埈(이준)의 형제급난도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선생은 월간(月磵) 이전(李㙉)과 창석(蒼石) 이준(李埈)형제의 출천한 우애를 그림으로 형상화한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를 보고, 이 그림이 탄생한 동기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봄에 이준(李埈)이 백씨 이전(李㙉)과 함께 상주목 관할 중모(中牟)의 고모담(錮鉧潭)에 있던 향병소(鄕兵所)에 머물러 있을 때 갑자기 왜적이 쳐들어왔다.
당시 이준(李埈)은 곽난(霍亂)으로 거의 기동을 못하여 그는 형에게 병으로도 죽을 몸이니 형님이나 피신하여 가문을 보존해 달라 간청했으나, 형은 끝내 동생을 업고 백화산(白華山)정상으로 피해 그 생명을 유지했다.
이 사실을 이준(李埈)이 1694년(숙종 20)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인에게 이야기하니 그들이 감동하여 화공에게 시켜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이 그림이 완성되자 이준(李埈)은 경향의 유명인에게 이 사실을 소재로 하여 여러 사람의 시문을 청한 글을 부록으로 그림 뒤에 부쳤다.
그중에는 우복 鄭經世(정경세)선생의 발문도 있다.
출전<이택용의 e야기>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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